[더리더]라는 영화를 처음 본건 21살 때의 일이다. 막 미성년 딱지를 뗀 내 눈에 영화의 초반 부분은 너무 야했다. 계속 보지 못하고 그냥 꺼버렸다. 뭔가 자극적인 느낌이라 뭔가 '부적절한 영화'라는 딱지를 붙여놓고, 그 뒤로 보지 않았던 영화였다.
아카데미상을 비롯한 많은 상에 노미네이트 되고, 수상했다는 기사를 건성으로 보면서도 그냥 그렇구나 했다. 그런데, 대학시절 교수님이 이 영화를 보고 보고서를 써오라고 하시면서, 수업시간에 영화를 틀어주셨다. 아... 이건 그냥 (부적절한) 로맨스 영화가 아니구나... 엄청난 영화였구나! 역시 소설이든 영화든 오래 봐야 알 수 있는데, 나는 그걸 잘 못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독일의 2세대인 남자 주인공과 전쟁을 겪은, 그리고 그 전쟁의 어떤 한 부분을 담당했던 여자 주인공의 이야기이다. 로맨스물이자 법정물이고, 전쟁 후 세대 간의 갈등을 다룬 소설, 그리고 영화였다. 영화로는 스티븐 달드리 감독님의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소설로는 베른하르트 슐링크 작가님의 [책 읽어주는 남자]
대학생 때 영화를 본 기억이 10년이 지난 지금 새삼스레 책을 읽자 새록새록 났다. 영화는 내게 깊은 여운을 남겼는데, 사실 그때 즈음 보았던 법정물들이 다 그렇게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새로웠다. 2차 대전 전범에 대한 법정물 그리고 무엇보다 그 판결이 너무 충격이어서.
지금에 와서 책을 읽으면서는 그저 멍... 이 주제에 이렇게 로맨스를 담아낼 수 있다니! 그래서 이야기는 한층 더 신선하면서 또 잔인해진다. 그리고 많은 생각이 오고 간다. 그저 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어머니의 이야기였다면 뻔했을 이 이야기의 흐름이 사춘기 시절 가장 나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던 잊지 못할 그리고 사랑했던 여인의 이야기가 되면서 이야기는 더욱 묘한 긴장감에 사로잡힌다.
1부는 내가 ‘부적절함’이라는 딱지를 붙인 그대로 이야기가 진행이 된다. 15살의 사춘기 소년과 36살의 여인. 길거리에서 토하던 소년을 도와준 것으로 인연을 맺은 두 사람의 이야기는 철저하게 소년의 시점으로 세심하게 묘사된다. 그래서 나는 약간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을 읽는 것 같았다. 그리고 뭔가 그가 더 그녀를 원하는 것 같다는 둘 사이의 면제부 같은 것이 주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내 몸 위에서 잠이 들고, 마당의 톱질 소리도 잠들고, 지빠귀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그리고 부엌에 있는 물건들의 색깔 중에서 약간 밝거나 약간 어두운 잿빛 색조만이 남게 될 때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다.
[책 읽어 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그 '부적절함'이라는 딱지를 떼고 1부를 잘 보면, 이 책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이 책을 정말 좋아하게 된 이유도 이 1부 때문인데, 2부에서 법정에 서야 하는 '한나'에 대해 독자들 역시 '판단'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법정의 판사와 검사들 그리고 피해자들과 다른 모든 가해자들은 결코 모를 그녀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앎'은 한나를 사랑했던 그리고 그 기억을 떨치지 못했던 미하엘뿐 아니라 나에게 까지 영향을 미쳤다.
놀랍게도 한나 역시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그녀는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이리저리 궁리하고 내가 구해준 자전거 안장 밑에 매다는 자루와 배낭을 꼼꼼하게 꾸렸다. ... "나는 지금 너무 흥분돼 있어. 네가 다 알아서 해 꼬마야."
[책 읽어 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우리가 미하엘을 통해, 그러니까 고작 15살의 소년을 통해 받아들였던 그녀에 대한 제한된 정보, 그리고 그녀를 향한 독자들의 어떤 마음이 전부 버무려진 채로 우리는 2부에서 그녀를 피고인으로 한 어떤 끔찍한 '전범재판'에 던져진다. 한나에 대한 미하엘의 감정의 선을 따라가던 나는 그대로 미하엘의 고뇌의 선을 따라가고 있었다. 심지어 평소에 어렵게 생각하던 아버지에게 조언을 구하기까지 한 미하엘의 선택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를 이해하지 못해도 비난할 수 없었다.
이해가 안 된 건 한나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래서는 안되었다. 이건 내가 영화를 보면서 더욱 강하게 느꼈던 것인데, 소설을 통해 그녀에 대한 정보가 늘어도 역시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래, 그럴 수 있어하고 받아들이기는 했나 보다 전처럼 분노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어쩌면 나도 마비된 채 눈으로만 책을 읽고 있었나 보다.
처음에는 재판의 대상과 결과들이 너무나 경악스러웠기 때문이고, 나중에는 그들에게도 마비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비증세는 판사들과 참심원들에게서 가장 심하게 나타났다. ... 그 경악스러움이 그들의 일상 속으로 침투하는 일이었다.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재판에 참석한 나는 그들의 반응을 거리를 두고 관찰할 수 있었다. ... 이러한 마비 상태 속에서 삶의 기능은 최대한도로 축소되고, 사람들의 행동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 무자비하게 되고, 가스 살포와 화장이 일상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책 읽어 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마음을 담을 수 없는 영화는 확실히 '한나'에 집중이 되어있고, 소설은 '미하엘'에 집중이 되어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책이 더 좋다. '마비되었다'는 표현이 정말 마음에 많이 남았다.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어 서러웠다. 가해자의 나라, 그러나 그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 독일은 '전범재판'을 열었을 정도로 그들의 '가해'행위에 대해 깊이 반성한 나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실제로 소설 내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미하엘과 그의 친구들은 그들의 부모조차도 가감 없이 심판대 위에 올린다. (법학과라면 그 정의감에 불탄 '치기'를 한 번쯤 겪어 보았을 거라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확실히 느꼈다. 이들도 역시 나처럼 제3자다.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닌 제3자 그들은 역사에서 자신을 분리해내었고, 그래서 '판단'하고, '반성'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행태의 일이 두 번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경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나의 재판을 보다가 유대인 수용소를 찾은 주인공에게서 나는 특히 이를 느꼈다.
우리 제2세대들은 유대인 박멸과 관련된 끔찍한 정보들을 실제로 어떻게 대해야 했으며 또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책 읽어 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한나의 재판에서 한나의 태도에서 나는 아이히만 전범 재판이 생각났다. 그는 수년이 흐른 후 열린 재판에서 그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반복했다고 한다. 한나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명령'을 들었고, 자신의 '책임'이 아닌 일에 대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고 한다. 유대인 수용소로 주인공을 데려다주던 운전기사 역시 그렇게 말했다. 총으로 유대인들을 하나하나 죽이는 것 그것은 그저 '일'이었다고. 한나는 계속해서 물었다. '재판관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리고 그 물음은 나를 향하는 것 같아서 내 심장이 괜히 서늘해졌다.
어떤 이유였든 간에 한나는 계속 '책임자'의 자리를 피해 '시키는 것만 하는'자리에서 일했다. 그곳이 공장이든 군대였든 간에, 그리고 1부에서 볼 수 있었듯 그녀는 심지어 섹스마저도 순서에 맞추어서 하는 것을 좋아했다. 마치 기계처럼. 그러나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그녀는 기계가 아니었다. 유대인 수용소에서조차 그녀는 아이들이 읽어주는 '책'을 읽었고, 미하엘이 읽어주는 책을 들으며 감정의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나는 하필 한나와 미하엘이 '책'으로 이어진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사람은 '기계'가 아니라고 '인간'이라고
책 읽어주기, 샤워, 사랑 행위 그리고 나서 잠시 같이 누워있기. 이것은 우리 만남의 의식이 되었다.
[책 읽어 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한나는 다시금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서 내가 읽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는 소설 중간에 삽입된 시들을 좋아했다.
[책 읽어 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2부의 재판을 지켜보면서 (독자는 역시 지켜보는 것 밖에는 할 수 없었다.) 나는 한나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재판이 진행되는 과정에 분노하면서도 차마 그녀를 향한 비난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를 미워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마음이 너무 복잡했다. 그녀의 비밀을 알고, 미하엘의 감정선을 따라 그녀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녀가 '악한', '나쁜' 사람이라고 곧바로 정의 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노래 중에 스텔라 장의 <빌런>이라는 노래가 있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개 say-
미하엘의 눈으로 내가 본, 때로는 상냥하고, 상처 받기 쉽고, 읽어주는 책에 다양한 감정을 드러내는 한나의 모습과, 사람들이 죽어가는데도 자신의 '일'이라며 그들이 죽게 내버려 두고 심지어 총을 가지고 도망 나오는 그들을 해치려 한 한나의 모습은 마치 다른 사람 같지만 분명 같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3부가 시작이 된다. 시간은 흐르고 미하엘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이혼을 한다. 그리고 한나가 수감된 8년 뒤 갑자기 책을 읽어 녹음을 해서 한나에게 보내기 시작한다. 그건 어떤 마음이었을까? 한 사람의 모습이 여러 가지이든 누군가를 향한 감정이 사랑 또는 미움으로 딱딱 끊어낼 수 없을 것이다. 분명 미하엘은 한나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가 어떤 사람이었든 간에 가장 영향받기 쉬운 시기에 가장 강렬한 감정을 나누었던 사람
그리고 동시에 그녀가 과거에 한 행위에 대해 용서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동시에 그녀를 버릴 수가 없었다. 마치 그림자처럼 그녀는 그를 따라다녔으니까. 그리고 사랑을 나눌 때에는 마음이 멀어지는 배신을 그리고 재판 중에는 그녀의 비밀을 이야기해서 재판으로부터 그녀를 구할 수 있었음에도 구하지 않았던 배신에 대한 죄책감을 그는 떨쳐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한나가 결국은 그가 글을 익히고, 그에게 각종 안부인사를 보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책만 녹음해서 보냈다는 사실은 미하엘이 계속해서 변명하듯 말하는 그 모든 감정을 잘 보여주는 행위였던 것 같다.
시간은 지나고 한나가 나오게 되었을 때, 그제야 찾아간 미하엘의 모습에서 한나는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을 보았길래 그녀의 얼굴빛은 꺼졌고, '너 무척 컸구나'라고 말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당신을 위해 이 모든 것을 준비했어요.라고 마치 여행을 준비할 때처럼 말하는 미하엘의 모습이 한나에겐 어떻게 보였던 것일까? 그리고 결국 '내가 책을 읽어 주던 때에 당신은 피해자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나요?'라고 물은 미하엘을 보며 한나는 무엇을 느꼈을까?
이 책은 끝까지 미하엘의 1인칭 시점으로만 되어있어 독자는 결코 한나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가 미하엘에게 대답한 그 답변과 글을 읽자마자 피해자들이 쓴 글과 재판기록 등을 읽어보았다고 하는 교도소장의 말을 통해 우리는 약간은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법정은 나에게 해명을 요구할 수 없지만, 죽은 사람은 그것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법정에 없었다. 재판을 받기 전에는 그들을 쫒아버릴 수 있었지만, 교도소에서는 그들과 자주 같이 있었다.'
나는 그 누구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무엇이 나로 하여금 이 일 또는 저 일을 하게 만들었는지 알지 못한다는 느낌을 가졌어. ... 그들은 나를 특히 잘 이해했을 거야. 이곳 교도소에서 그들은 나하고 자주 같이 있었어. 그들은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매일 밤 나를 찾아왔지. 재판을 받기 전에는 그들이 나한테 오려고 하면 쫒아버릴 수 있었어
[책 읽어 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만약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버리면, 나는 또 쉽게 한나를 용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남긴 돈을 한나와 그녀를 비롯한 교도관들의 만행을 책으로 써서 세상에 알린 피해자이자 생존자 모녀 중 '딸'에게 가져다주는 장면에서 나는 누군가를 그럴 자격도 없으면서 '용서'하려 했는지 느끼면서 또 가슴이 서늘했다. 한나의 말대로 그 '용서'조차도 피해자 그녀 때문에 죽은 이들의 몫이었다. 가해자인 한나가 자신의 '형량'에 의미를 부여하고, 다른 이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진정한 '용서'는 피해자들의 몫이고, 우리 모두는 그걸 쉽게 간과한다.
이 돈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 내게 제안을 하나 해주시겠어요? 이 돈을 홀로코스트와 관련된 곳에 쓰는 것은 정말로 내가 해줄 수도 없고 또 해주고 싶지도 않은 사면과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책 읽어 주는 남자] 베른하르트 슐링크
사실 그렇게 긴 책은 아니었다. 그러나 책과 영화의 간극이 크게 느껴졌고, 책으로 읽는 전쟁세대와 전쟁 후 세대의 간극도 나는 크게 느껴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고를 받아 형을 살게 된 가해자와 피해자의 간극을 느꼈다. 많은 생각을 했고, 다소 흥분을 좀 했고 그래서 이 책에 대한 후기를 쓰기까지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다. 후기를 쓰면서 새롭게 느낀 부분도 굉장히 많다. 책과 영화를 둘 다 꼭 보라고 추천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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