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에 살 때 남편과 함께 벼르고 별러서 클래식 공연을 보러 간 적 있다. 드레스 멀끔하게 차려입고 간 것은 아니고, 와이젠키라는 공원에서 무료로 하는 공연인데, 퀄리티도 좋고, 그 공원 자체가 매우 아름다운 곳이라고 해서 전체적인 일정이 끝이 날 때 다녀왔었다.
사실 클래식은 잘 모른다. 그러나 스피커를 통해 공원 전체에 그리고 무대 가까이서는 조금 더 생생하게 들리는 피아노의 선율은 정말이지 말을 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다소 진부한 표현이지만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는 표현으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 귀에 들리는 음악을 글로 표현하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차라리 그 소리를 말로 표현하라 하면, 온갖 의성어들을 섞어서 설명할 텐데, 눈으로 봐야 하는 글로는 그걸 묘사 하기가 참으로 힘들 것이다.
나는 사실 빙빙 둘러 묘사를 묘사하는 방식의 소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눈앞에 선명히 상상할 수 있는 글들을 좋아한다. 그러나 클래식을, 그러니까 피아노 콩쿠르를 주제로 한 소설에서 음악을 어떻게 해서든지 표현하지 않으면, 그저 참가자가 피아노를 치고, 관객이 감동하고, 또 심사위원들이 날카롭게 심사하는, 내가 흔히 보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글로 읽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 것이다.
너무나도 안타깝게도 나는 지금 이 주인공들이 피아노로 연주하는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수 없으니까, 작가는 성심 성의껏 그 음악을 글로 표현했다.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그리고, 코와 입과 피부에 닿는 모든 것을 동원하여 눈으로 읽은 그 글을 음악으로 느끼게 해 주었다.
구상에만 12년, 취재 11년, 집필기간만 7년이었다는
온다 리쿠 작가님의 [꿀벌과 천둥]
각자의 사정을 지닌 네 사람의 참가자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지만, 마치 드라마의 장면이 바뀌듯 소설은 계속해서 그 시선을 바꾼다. 각각의 참가자의 마음을 들추어 보았다가, 심사위원, 스텝 그리고 참가자의 주변 사람들까지, 무엇을 보고 느끼는지 계속해서 장면을 전환한다.
하나의 곡을 연주할 때, 연주자와 심사위원 그리고 그 가족이나, 다른 참가자가 그 음악을 듣고 무엇을 느끼는 지 다양한 각도로 보여주지만 혼란스럽지 않고, 오히려 연주하고 심사하는 반복적인 콩쿠르의 특성상 다소 루즈하고 지루해질 이야기의 흐름을 지루하지 않게 끌어가는 힘이 된다.
또한 이 모든 시점은 결국 각 주인공들을 이해하는데, 그리고 그들의 음악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한 사람을 한 가지 시각으로 보면 단편적인 것만 보게 되지만, 다양한 시각으로 보게 되면, 그 사람을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특히 이 책에서는 그 사람의 연주를 또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굳이 그들이 연주하는 음악을 찾아보지 않더라도 마치 음악을 듣는 관중의 한 사람이 된 것처럼 음악을 '느꼈다'.
그렇게 눈으로 글을 읽으면서도 음악을, 그들의 연주를 느낄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작가님의 묘사도 한몫, 아니 두몫(?)은 했다. 묘사가 유치하거나 너무 오글거리면 책을 읽고 몰입하는 데에 방해가 될 수 있는데, 눈에 그려지는 작가님의 묘사는 유치하지도 너무 오글거리지도 않아서 오히려 그 연주를 더 이해하려고 더욱 열심히 읽게 되었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서 잊히지 않았던 묘사가 있다. 이건 연주에 관한 건 아니었지만, 작가님이 얼마나 고심해서 글을 쓰셨는지 느껴지는 그리고, 이런 묘사라면 정말 읽을만하겠다고 생각했던 부분,
주인공중 한 명인 '아야'가 13살 어린 나이로 어머니를 잃고 더 이상 피아노를 칠 이유를 잃어버리고 말았을 때,
피아노에 대한 그녀의 시선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부분이 특히 정말 마음에 와 닿았다.
무대 위의 그랜드 피아노는 반짝반짝 빛을 내며 이제부터 흘러 넘 칠 음악을 속에 가득 담고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를 잃기 전 그녀에게 피아노는 음악을 가득 담은 상자였다. 어서 저기서 음악을 꺼내야 해!! 발을 동동 구르며 당장이라도 꺼내 주고 싶었던 음악이
휑하고 공허한 묘비. 쥐 죽은 듯 고요하게, 침묵과 정적에 오롯이 몸을 맡기고 있는 검은 상자.
어머니를 잃은 아야에게는 그저 묘비가 되어 버렸다는 표현은
그저 몇 줄 만에 아야가 무대에서 사라진 이유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또, 마사루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을 청소하는 것에 비유한 것도 재미있었는데, 마사루가 평소 피아노를 연주하는 태도와 그리고, 지금 나단조 소나타를 연주하는 심경을, 그리고 심지어 마사루의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곡을 다듬는 작업은 어딘가 집 청소와 비슷하다. 마사루는 연습할 때면 늘 그렇게 생각한다. 깨끗한 방을 바라보며 거기서 사는 모습을 상상할 때는 좋지만 실제로 살아보면 사정이 달라진다. 집을 유지하는 청소는 끊임없는 육체노동이다. 연주도 마찬가지. 항상 집 전체를 깨끗하게 유지하기란 어렵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그저 앉아서 귀로 듣기만 하면 되는 연주를 실제로 하려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잘 보여주는 그리고 확 와 닿는 표현이었다. 실제로 매일매일 집을 깨끗이 유지하는 것은 힘들고, 또 겉으로 보기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잘 티가 나지 않는 일이니까.
실제로 피아니스트에게 물어보고 싶어 졌다. 이 표현에 혹시 공감하느냐고...
이렇게, 연주를 하고, 듣고, 심사하는 이들의 마음을 느낄 뿐 아니라 콩쿠르가 가진 여러 가지 뒷이야기 라던가, 심사위원이나, 무대 매니저들의 고충 등 콩쿠르를 주제로 한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예를 들면, 극적인 곡의 완성을 위해 입는 드레스가 얼마나 불편한지라던가, 피아노를 조율하는 조율사에 대한 이야기라던가. 전혀 관심이 없어서 그리고 관심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웬만해서는 모를 콩쿠르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보면서 작가님이 이 소설을 위해 얼마나 많이 조사하셨는지를 느꼈다.
그리고 아야를 비롯한 다양한 천재들이 어떤 고충을 가지고 사는지 또한.
마치 내가 콩쿠르에 출전한 것처럼 또는 그 관객 또는 심사위원이 된 것처럼 하나의 콩쿠르를 따라 숨 죽여가며 책을 읽다 보면, 하나의 대장정을 마친 것처럼 맥이 탁 풀린 상태로 책을 덮게 된다. 딱히 응원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누가 일등을 하길 바라면서 본 것도 아니었으면서, 그래, 일등은 누가 되든 상관없는 것이었어... 하며 결과를 보여주는 마지막 장에도 덤덤해지는 것이다.
주인공을 응원하며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마음을 졸이며 보지 않고, 그저 계속해서 주인공을 이해하고, 그들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때로는 심사위원의 마음으로 때로는 가족의 마음으로 또 때로는 당사자의 마음이 되어서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해해 나가면서...
오랜만에 다시 꺼내 든 호흡이 긴 책이었다. 사실 이 온다 리쿠 님의 [꿀벌과 천둥]은 내가 거의 삼 년 전 읽고 매우 감동받아서 블로그에도 후기를 쓰고, 사람들에게 추천해주곤 했던 책이다. 얼마 전 참여한 독서모임의 호스트 님이 미션을 가지고 하는 글쓰기 오픈 채팅방을 여셔서, 책을 추천하고, 그 책 속의 글을 따라 적어보자고 하셔서 이 책이 생각났다.
그래서 다시 읽어 봤는데, 역시나 너무나 좋았다. 손에서 폰을 놓을 수가 없었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듯, 또 장편 드라마를 보듯 상상하고 느끼면서 책을 읽었지만, 이전에 읽었을 때에도 지금도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2020년 10월에 영화화가 되어 개봉을 했다고 해서 고민 고민하다가 예고편을 봤는데, 이미 예고편부터 이 책의 감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 실망했다. 영화는 안 보기로 했다.
혹시 책을 보지 않고 영화를 보신 분이 계시다면 꼭!! 책을 읽으시길 추천한다. 영화는.. 음.. 각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나는 안 보기로 결정했으니까 영화에 대해 말하는 건 실례인 것 같다.)
겨울에 읽으면 마음이 따뜻해질 책, 여름에 읽으면 시원해질 책, 클래식을 일도 몰라도 책의 표현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읽으면 되는 (물론 곡들을 찾아봐도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이 지나서 또 읽어도 또 좋을 것 같은 책이었다.
+ 읽으면서도 그리고 이렇게 글로 남기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너무너무 많아서 정리가 안 되는 느낌이다. 평범한 이들의 음악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던 아카시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좋아하는 팬텀 싱어의 강형호 님의 이야기도 하고 싶었고, 또 요즘 잘 보고 있는 오디션 프로그램인 싱어 게인 이야기도 하고 싶고,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이미 글이 너무 길어진대다가 깔끔하지도 못한 글 상태에 포기한 이야기가 가슴속에 한가득이다. (눈물)
++ 한 1년 정도 뒤에 또 읽고 또 후기 남겨야지! 그때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
+++ 책은 정말 너무 마음에 드는데, 후기로 남기는 내 글은 정말 엉망진창이어서 속상하다. 그래도 또 써야지 쓰고 쓰고 또 쓰다 보면 가슴속에 머릿속에 가득 담긴 이 말들을 제대로 정리해서 쏟아낼 수 있겠지.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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