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는 나의 꿈의 직업이다. 나는 영어를 싫어하면서도 좋아하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잘 안되고, 아이들을 끝내주게 가르칠 수 있지만, 정작 내 시험에서는 자꾸 얼마 간 점수가 모자라는 영어와는 굉장히 애증의 관계이다. 폴란드에 지내면서 얼마간 배웠던 폴란드어 역시 언젠간 정복하고 말 거라는, 등산가에겐 '히말라야'같은 존재인 것 같다. 그래서 번역가의 이야기를 지나치지 못하겠다고 생각해서 항상 장바구니에 넣어 놓고 정작 제대로 읽어보지는 못한다. 어찌할 수 없는 열등감이 자꾸 심장을 쿵쿵 때리기 때문이다. '너도 해! 제발 좀!! 공부하라고!!!'
마틸다를 원서로 읽으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돼서 요즘 많이 속상한 상태여서 더욱 영어 또는 번역과 관계된 책을 또 피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미 제목부터 나를 붙잡았다.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제목이란 말인가? 제목 위에 '번역가 권남희 에세이집'을 한참 보다가 결국 책을 펼쳐 들었다. 도저히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하는 제목을 놓고 지나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이름을 가진 몇백 권의 번역서를 가진 번역가, 그리고 벌써 취준생 딸을 둔 엄마. 그리고 노견을 돌보는 견주 이 책에는 권남희 작가님의 삶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이전에 읽었던 책 장강명 작가님의 [책, 이게 뭐라고]를 읽지 않았다면 나는 이 책도 똑같이 길을 잃으며 덮었다가 폈다 했을 것 같다. 그러나, 그저 작가님과 TMI 가득한 수다를 듣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미 나 보다 먼저 살아간 어떤 이의 세상 사는 이야기를 듣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지극히 편안하게 책을 읽었다.
그리고 솔직히 장강명 작가님 보다 훨씬 부드러웠고, 그 내용도 생각과 고찰보다는 그녀의 삶에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더 잘 읽혔다.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히의 '고민상담소'가 열렸을 때 당첨되었던 이야기, 번역가로서 일을 할 때 좋았던 점과 힘들었던 부분들, 그리고 친구들 또는 딸과 그리고 또 혼자서 여행한 이야기 등 가끔 만나 '어떻게 지냈어?' 하면 떠들게 되는 그런 이야기들이 책을 가득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이렇게 재미있는 수필을 써 보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굳이 깊이 있는 고찰로 책을 채우지 않아도, 꾸밈없는 나를 제대로 보여주는 이런 글들... 물론, 나는 생각이 너무 많은 것과 그 생각을 또 끄집어내야만 하는 성질머리이긴 하지만 말이다.
책을 읽는 내내 조잘조잘 작가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말이지 내가~'하며 함께 깔깔 거리는 것 같은 기분으로 즐겁게 책을 읽었다. 그리고 작가님 성격이 나랑 비슷한 부분이 많아서 많이 공감을 했고, 작가님의 경험하고 느끼신걸 잘 말씀해 주셔서 많이 배웠다. 말로 하면 잘 안 들어오는 잔소리 같은 이야기가 어찌 책으로 읽으면 이리 쏙쏙 들어오는지.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오조오억 명이더라도 나는 누군가가 싫어하는 오조오억 명에 들어가기 싫은 게 사람의 마음.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권남희
그리고 엄마 생각이 참 많이 났다. 작가님께서 50대 이시며, 취준생 아이를 두신 분이라 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우리 엄마랑 딱 한 살 차이가 났다. 게다가 딸과 굉장히 친구처럼 지내시며, 아끼고 자랑스러워하시는 것을 보며 마치 우리 엄마와 나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엄마와 친구처럼 지내고 있고, 서로 고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연락하는 사이다.
그래서 작가님께서 딸과 일본 여행 가신것을 보고 나도 엄마와 함께 단 둘이 여행을 가고 싶다 생각했다. 멀고 먼 유럽으로.
아이들에게 힘내라는 힘나지 않는 위로도, 잘 될 거라는 무책임한 격려도 할 수 없다. 무심하면 서운해할까 봐 관심 가지면 부담스러워할까 봐 조언하면 짜증 날까 봐 잔소리하면 상처 받을까 봐 조심스러울 따름이다.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권남희
우리 엄마도 이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대입에 취업에 허덕이는 딸을 보며, 그리고 아들을 보며... 특히 조금만 신경 써도 끙끙 앓아눕는 딸을 바라보면 얼마나 발을 동동 댔을까. 읽다가 문득 엄마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다.
딸과 일본에 여행가는 이야기(망한 여행이었지만,) 친구들과 유럽여행을 간 이야기도 읽으면서 엄마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우리 엄마랑 나도 해외여행 가고 싶은데 특히 유럽... 하고... 나는 엄마와 정말 친구처럼 지내고 있고, 고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연락하는 사람도 엄마이기 때문에 딸을 아끼고, 자랑스러워하고, 또 친구처럼 지내는 모습이 우리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대학생이던 정하를 구슬려 바로 예약했다. 특가와 온천이라는 매력에 꽂혔다. 마쓰야마는 일본 지도의 저 아래쪽에 있는 작은 섬 시코쿠에 있는 도시다 유명한 도고온천이 있고, 일본의 국민 작가인 나쓰메 소세키의 대표작 [도련님]에서 도쿄에 사는 도련님이 중학교 교사가 되어 첫 발령을 받아 간 곳이기도 하다. 여하튼 시코쿠는 [도련님]을 번역하며 글로만 봤을 뿐, 아주 낯선 곳이었다.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권남희
작가님에 대해 찾아보니, 내가 읽었던 많은 일본 소설들이 작가님이 번역하신 거였다. 우와..
특히 구로야나기 테츠코 작가님의 [창가의 토토]는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굉장히 감명 깊게 본 소설인데, 이 책도 작가님이 번역하신 거였어서 정말 놀랐다. 그저 하루키나 온다 리쿠 등 최신(?) 작가들의 책들을 생각했었는데, 새삼 드래 작가님의 경력이 정말 오래되었구나 느꼈고, 또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이 알고 보니 아주 어렸을 적 살았던 동네의 이웃이었던 것처럼 반가웠다.
번역하는 일을 하시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책을 많이 읽으시는데, 그 책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고, 실제로 작가를 만난 이야기도 좋았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한 명의 팬으로서 하루키의 고민상담방에 글을 남기신 이야기도 재미있었고, 그렇게 좋아하는 일본 작가가 많지만, 하루키의 노벨상에 대해 말할 때, '번역가로서 인터뷰가 하기 싫고, 일본에 상을 주기 싫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하루키의 노벨상 수여를 바라지 않는다고 하신 부분이 웃겨서 책을 읽다 낄낄거렸다.
책을 읽기 전 책에대한 소개글에서 작가님이 글을 유쾌하게 쓰신다고 하셨는데, 정말 그랬다. 읽는 내내 즐거웠다. 앞으로 일본 소설을 읽다가 번역가에 작가님의 이름을 만나면 친구 이름을 본 듯 반가울 것 같다. 그리고 그저 작가님의 삶을 담은 이 에세이 만으로 나도 다시 움직일 힘을 얻었다.
'reading' 카테고리의 다른 글
25.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레몬심리 (0) | 2021.01.26 |
---|---|
24. 저수지 13 - 존 맥그리거 (서평단) (0) | 2021.01.25 |
22. 파라미터O - 이준영 (0) | 2021.01.16 |
21. 가재가 노래 하는 곳 - 델리아 오언스 (0) | 2021.01.14 |
20. 책, 이게 뭐라고 - 장강명 (0) | 2021.01.12 |
댓글